지기(志氣)가 탁월하여 세상 일에 얽매이지 않으셨다.영락(永樂) 乙酉(一四0五)에 요재공(樂齋公)과 부정공(副正公) 두 형에게 묻기를「저는 고려(高麗) 때 벼슬을 하지 않았으니 밝은 시대를 만나 벼슬을 하여 뜻을 펼치고자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하니 요재공과 부정공 두 형께서는 비록 절의(節義)를 지키시는 중이었지만 동생의 큰 뜻을 아시고는 벼슬을 해도 된다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한번 과거(科擧)에 응시해 급제하시어 광양현감(光陽縣監)으로 나가 잘 다스린다는 명성(名聲)이 자자하였는데 의심나는 일이 있자 하루아침에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유유자적(悠悠自適)하면서 일생을 보내셨다. 돌아가신 후에 조정에서 가선대부(嘉善大夫) 병조참판(兵曹參判) 겸오위도총부 부총관(兼五衛都摠府副摠管)에 추증(追贈)하였다. 墓순창군 품곡면(品谷面) 등동(嶝洞) 유좌(酉坐)인데 승지(承旨) 박경원(朴經遠)이 묘갈명(墓碣銘)을 지었다.配정부인(貞夫人) 安東金氏(안동김씨) 墓부좌(?超埰?) 父사직(司直) 김계온(金啓溫) 祖직제학(直提學) 김두기(金斗箕)!61-999??忠獻公諱元吉四子節制公諱琰派二疊파선#H玉川(淳昌)趙氏大同譜卷之一 忠獻公節制公派二疊!61-999-1璋 洪珪 佺 元吉!62 琰(염)| 字炎玉(염옥)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보공장군(保功將軍) 절제도위 겸북도함성만호장(節制都尉兼北道咸城萬戶長)을 지내셨다. 墓순창군 웅덕(熊德)에 있었는데 실전(失傳)하였다.配淳昌薛氏(순창설씨) 墓순창 명막암(明幕巖) 父옥천군(玉川君) 설훈(薛勳)!62-999??太師公諱璵孫判書公諱淵派二疊파선#H玉川(淳昌)趙氏大同譜卷之一 太師公判書公派二疊!62-999-1璋 洪珪 璵 元琦!63 淵(연)| 문학(文學)으로 세상에 널리 알려지셨다.태종(太宗)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사인(舍人)이 되어 벼슬이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이르렀다. 墓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실전(失傳)하여 후손들이 癸亥(一九八三)에 임실군 임실읍(任實邑) 갈마리 선영(先塋) 아래 유좌(酉坐)에 단(壇)을 모으고 제사를 모시고 있다.配정부인(貞夫人) 東萊鄭氏(동래정씨) 父평장사(平章事) 정천유(鄭天濡)삼가 구보(舊譜)를 조사하여 보면 공께서 박충좌(朴忠佐) 이제현(李齊賢) 윤탐(尹耽) 나영걸(羅英傑) 조문근(趙文瑾) 정천유(鄭天濡) 홍준(洪俊) 등 제현(諸賢)과 함께 날마다 교대로 경연(經筵)에서 임금을 모시고 글을 읽으셨다고 하였는데 시대를 따져보면 태사공(太師公)의 사적이 여기에 잘못 기재된 것이 분명하므로 이제 옮겨서 바로잡는다.!68-999-1璋 洪珪 璵 元琦!69 ?搾?(의)| 조산대부(朝散大夫) 한림(翰林)을 지내셨으며 다른 자세한 사적은 전하지 않는다.!69-999??太師公諱璵孫府使公諱浣派二疊파선#H玉川(淳昌)趙氏大同譜卷之一 太師公府使公派二疊!69-999-1璋 洪珪 璵 元琦!70 浣(완)| 初諱冬暉(동휘) 고려(高麗) 때 정순대부(正順大夫) 종부시사(宗簿寺事) 서주부사(西州府使)를 지내셨다. 墓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실전(失傳)되어 후손들이 임실군 임실읍 갈마리 선영(先塋) 아래 유좌(酉坐)에 단(壇)을 설치하여 음력 10월초3일에 제사를 모시고 있다.配咸陽朴氏(함양박씨) 父박우(朴佑)